국내 PKI 기술의 발전사와 향후 전망
2025.06.25목차
국내 PKI 기술의 발전사와 향후 전망: 디지털 신뢰의 뿌리, 그 진화와 미래를 말하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된 지금, 사용자 인증과 데이터 무결성 보장은 모든 온라인 서비스의 출발점이자 핵심 요소다. 그 중심에는 PKI(Public Key Infrastructure), 즉 공개키 기반 구조가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 공인인증서를 기반으로 한 PKI 인프라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제도와 기술, 시장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이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공인인증서가 사라진 시대, 민간 인증이 경쟁을 벌이고 생체정보와 양자내성암호의 도입이 논의되는 지금, PKI는 과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 걸까? 본 칼럼에서는 PKI 기술 발전의 흐름을 도입기, 성장기, 전환기, 성숙기, 그리고 다가올 미래로 나누어 살펴보며, 우리가 준비해야 할 다음 단계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1. 도입기 (~2010년): 제도로 시작된 PKI의 정착
우리나라가 PKI 기술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시점은 2000년 전자서명법이 제정되면서부터였다. 전자거래의 법적 효력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지정한 인증기관(CA)에서 발급한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도록 제도화했다.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모델이었고, 정부의 강력한 추진으로 인증서는 인터넷뱅킹과 전자정부 서비스 전반에 빠르게 확산됐다.
공인인증서의 기술적 기반은 RSA 1024bit와 SHA-1, X.509 인증서였으며, 대부분의 인증 환경은 ActiveX 컨트롤에 의존했다. 이는 당시 국내에서 독점적으로 사용되던 인터넷 익스플로러와의 궁합 덕분에 가능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보안과 호환성 문제, 브라우저 의존성, 그리고 낮은 사용자 편의성이 부각된다. 이로 인해 '보안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가장 큰 의미는 ‘디지털 신뢰’라는 개념을 공공과 민간 모두에 뿌리내렸다는 점이며, 인증서라는 새로운 기술을 일상생활로 끌어들인 최초의 단계였다.
2. 성장기 (2010~2020년): 모바일 시대의 도래와 변화의 조짐
2010년대를 지나면서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자, 고정된 PC 환경에서만 작동하던 인증 시스템의 불편함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인인증서를 스마트폰으로 옮겨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PC 인증서 발급, 파일 이동, 보안토큰 사용과 같은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고, 사용자들은 점점 피로감을 호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금융권과 민간 기업은 다양한 방식의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드웨어 보안토큰 외에도, 스마트폰 저장소, 클라우드 인증서, ARS 연계 방식 등이 순차적으로 도입되며 인증 방식은 점차 유연해졌다. 기술적으로도 RSA 2048bit, SHA-256과 같은 보다 강력한 알고리즘이 표준으로 자리잡았고, 인증 방식은 점점 모바일 친화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여전히 '공식적인' 인증 방법은 공인인증서 하나뿐이었다. 사용자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바뀌지 않았고, 시장의 혁신은 규제와 제도의 틀 안에서 제한되었다. 이 시기는 제도와 기술, 사용자 기대 사이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자,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기간이었다.
3. 전환기 (2020~2024년): 제도의 해체와 기술 경쟁의 시작
마침내 2020년 12월, 전자서명법이 개정되면서 공인인증서 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공인'이라는 용어가 생략되며 모든 전자서명은 동등한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되었고, 인증서 시장은 민간 경쟁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인증 수단이 다양해진 수준을 넘어, '인증'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PASS 인증서, 네이버/카카오 인증서, 금융권 모바일인증서, 드림인증 등 민간 사설 인증 서비스가 빠르게 등장하며 UX와 서비스 경쟁이 치열해졌다. 기술적으로도 RSA 3072~4096bit와 ECC 기반 암호, 블록체인 서명, 클라우드 인증서까지 적용 범위가 확장되었고, 다양한 디바이스와 브라우저 환경에서 매끄럽게 동작하는 인증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인증은 더 이상 ‘정부가 지정한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의 핵심 경험으로 진화했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빠르고 편리한 인증 방식을 원했고, 기업은 이를 새로운 고객 접점이자 경쟁 요소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기술과 UX가 제도보다 앞서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4. 성숙기 (2025~2030년 예상): 통합 플랫폼과 미래 암호로의 전환
2025년 이후 인증 환경은 어느 때보다 복잡해지고 있다. 하나의 인증서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시대가 저물며, 인증은 다양한 방식과 기술이 합쳐진 통합형 경험으로 진화하고 있다. 기업은 고객의 접속 위치, 디바이스, 행동 패턴 등을 기반으로 인증의 ‘맥락’을 분석하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인증 방식을 유동적으로 제공하는 추세이다.
기술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존 RSA나 ECC 기반 알고리즘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양자 컴퓨팅의 위협에 대비한 ‘양자내성암호(PQC, Post-Quantum Cryptography)’ 도입 논의가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가 선정한 후보군을 중심으로 현재의 암호 체계를 점진적으로 대체하거나 병행 적용하는 하이브리드 서명 체계가 준비되고 있다. 또한 인증 대상은 더 이상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IoT 센서, 산업용 로봇, 자율주행 차량, 의료기기 등 사물과 소프트웨어가 독립적으로 인증을 받아야 하는 환경이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사물 인증’과 ‘코드 서명’이 새로운 성장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서비스 관점에서도 변화는 뚜렷하다. 정부는 디지털플랫폼정부를 통해 공공 인증 구조를 재설계 중이며, 금융·교육·물류 분야에서는 사설인증, 모바일신분증, FIDO2, DID, 클라우드 인증 기반의 플랫폼 통합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이제 인증은 단일 기능이 아니라, 디지털 서비스의 시작점이자 핵심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5. 2030년 이후: 양자내성암호의 정착과 글로벌 인증 연계의 필요성
2030년이 지나면 인증 기술은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이할 전망이다. 양자컴퓨터가 현실화됨에 따라 기존 암호체계는 보안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고, PQC는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가 될 것이다. RSA와 ECC는 점차 퇴장하고, Kyber, Dilithium, Rainbow 등 NIST에서 채택한 PQC 알고리즘이 실제 서비스에 본격적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가 간 인증 연계가 중요한 요소로 부상할 것이다. 유럽연합의 eIDAS 2.0, 미국의 Digital ID Framework, 일본의 신디지털화 전략에서 알 수 있듯, 각국은 신뢰할 수 있는 전자신원 체계를 글로벌 수준으로 확장하려 하고 있다. 한국 역시 글로벌 SaaS, 금융 플랫폼, 디지털 수출입 환경에서 인증 연계를 위해 Cross-border PKI 체계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인증 대상도 점점 더 다변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용자뿐 아니라, 데이터 자체, 알고리즘, AI 모델, 거래 단위까지 실시간으로 인증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할 것이며, 이는 결국 지능형 인증 인프라로의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인증은 단순한 보안 도구가 아닌, 디지털 생태계를 지탱하는 신뢰의 플랫폼으로 진화할 것이다.
발전 단계별 기술 비교표
실천 단계: 수요 기업과 보안 솔루션 공급자가 공통적으로 준비해야 할 사항
인증 기술과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이를 사용하는 주체와 기술을 제공하는 기업 모두 적극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1) 인증 수요가 있는 기업이라면
먼저, 기업이나 기관은 현재 자사 시스템이 사용하는 암호 알고리즘의 수준과 알고리즘이 따르는 인증 구조를 점검해야 한다. 또 RSA/ECC 기반 인증 구조를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가늠해보고, PQC 전환을 준비할 방법을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서비스 UX 관점에서 인증 방식을 통합하고, 고객 경험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보안을 강화할 방법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DID, FIDO, 간편인증, 생체정보 등 너무 많은 인증 방식은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통합 인증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글로벌 인증 연계, 전자계약, 해외 SaaS 연동 등 미래 수요에 맞춰 자사의 인증 체계가 확장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는지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
2) 보안 솔루션 제공업체 또는 인증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라면
기술 공급자 입장에서는 PQC 대응 제품 개발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하이브리드 서명 체계, PQC 지원 인증서 관리 시스템, 브라우저와 모바일 연동 지원 등은 이미 선진 시장에서 요구되는 요소이다. 또한 고객의 인증 요구는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 금융, 공공, 교육, 헬스케어, 물류 등 각 분야마다 요구하는 인증 시나리오가 다르기 때문에, 범용 제품이 아닌 분야별 특화된 인증 UX와 API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인증 서비스는 ‘보안’이 전부가 아니다. 속도, 편의성, 자동화, 사용자 경험이 함께 가야 한다. 기존의 ‘보안 중심 사고’에 ‘서비스 설계적 사고’가 더해져야만 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맺음말
디지털 사회에서 인증은 서비스 사용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인증은 신뢰를 보증하는 기술이자, 데이터를 연결하는 문지기이며, 사용자 경험을 완성하는 마지막 고리다. PKI는 이미 과거에 알던 기술이 아니며, 변화하는 내일을 향해 계속 진화 중이다. 그 진화를 앞서 준비하는 자만이 신뢰받는 서비스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